추억을 담은 상자

끄적 2014. 7. 21. 22:08


흙먼지를 뒤집어쓴 상자가 있습니다. 

이 상자는 왜 이렇게 더러워진 걸까요? 누구의 것일까요? 안에는 뭐가 들었을까요?

하나씩 천천히 대답해 드리자면 이 상자는 소년의 것이고 소년의 추억이 들어있습니다.

이 상자가 더러워진 이유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소년이 추억을 버린 것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처음에 소년은 다른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부모님이 있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러나 지금 소년에게는 남아 있는 게 없어요. 모든 것을 저 상자 속에 담아뒀기 때문이겠죠. 

소년이 어렸을 때 그러니까 10살 정도였을까요? 소년은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소년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늘 하듯 소년은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혔죠. 

그 강도가 너무 심해 문제였지만요. 

소년은 소녀를 자신 혼자 괴롭히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소녀를 괴롭히게 하였어요. 

소년이 인기가 많았던 게 문제였어요. 모든 아이가 소년을 따랐거든요.

소녀는 계속되는 괴롭힘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자신이 괴롭힘을 받는 이유조차 몰랐으니 더 힘들었겠죠. 그러다 소녀는 한가지 결심을 했어요. 

자신을 왜 괴롭히는지 직접 물어보기로요. 비웃음당할 거라는 사실을 예상했지만요.

"너희 날 왜 괴롭히는 거야?"

말하고 바로 들려올 비웃음을 기다렸는데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어요.

"그냥"

그냥이라니 소녀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그냥 괴롭히는 게 어딨냐며 따지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은 그 말도 옳다고 생각했죠.

애초에 아이들도 소녀를 괴롭히는 이유도 모른 채 괴롭히는 거에 지쳐가던 참이었어요. 

그래서 소녀가 소년에게 가 물어보는 것을 말리지 않고 소년의 대답을 기다렸어요.

"너 날 왜 괴롭히는 거야?"

소년은 당황했어요.

자신도 왜 소녀를 괴롭히는지 이유를 모른 채 괴롭히다가 아이들이 같이 괴롭히니까 계속 괴롭힌 거였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들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소년은 거짓말을 했어요.

"네가 싫어서"

소녀는 소년의 대답을 듣고 몹시 슬퍼졌어요. 왜 그랬을까요? 짐작은 했지만, 소년의 입으로 들으니 너무 슬퍼서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소녀는 뛰쳐나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곧 아이들에게 붙잡혔죠.  

소년이 소녀가 싫어서 괴롭힌다는 단순한 소리를 아이들은 이유로 받아들였고 소년을 따라 자신들도 소녀를 싫어하자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은 소녀에게 말했어요. 

"우리도 네가 싫어!" "우린 네가 이 세상에 없으면 좋겠어!"

아이 중에서는 이런 말을 하는 아이들도 몇 있었어요. 

소녀는 그 말을 듣고는 땅에 주저앉았고 아이들은 그런 소녀를 놀리고 비웃었어요.

그러다 재미가 조금씩 없어질 때쯤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죠. 

혼자 울고 있는 소녀를 내버려두고요. 

소년은 혼자 울고 있는 소녀를 보자니 마음이 아팠지만 왜 그런지는 몰랐어요. 

그 아픔을 무시한 채 집으로 돌아갔죠. 다음날 무슨 일이 생길지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요.

다음날 소녀는 죽은채로 발견되었어요. 

'나는 혼자야. 아무도 날 위해주는 사람이 없어'라는 글을 남긴 채요. 소년은 그제야 깨달았어요.

어제 아팠던 가슴은 소녀가 불쌍해서라는 사실을요. 그리고 자신이 소녀를 좋아했다는 사실을요. 

그러나 이제 좋아하는 소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소년은 좋아하는 사람을 잃었어요. 

처음에는 소년도 소녀에게 잘 대해준 적이 있었어요.

그러나 소년은 누구에게나 잘 대해줬기에 소녀와 아이들 그리고 소년 자신조차 소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몰랐죠. 

게다가 소녀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자신이 잘 대해줘도 그냥 시큰둥한 반응이었기에 소녀를 괴롭히기 시작한 거였어요.

그리고 그 결과는 끔찍하게도 소녀의 자살이라는 결과가 나왔고 소년은 소녀와 있었던 좋은 추억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꺼내 상자에 담아 땅에 묻었어요. 

자신이 괴롭혔던 사실도요. 그래서 소년은 소녀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답니다.

소녀에 대해 전부 잊은 소년은 어딘가 자신의 마음이 비어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소년은 부모님에게 기댔죠. 이 공허함을 부모님이라면 채워 줄 거라는 기대를 하고요.

그렇게 소년은 부모님과 친하게 지내던 나날을 보냈어요. 

하지만 그런 소년에게도 사춘기가 왔어요. 소년은 부모님과 충돌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어요. 

누구나 겪는 과정이지만 소년의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봐요.

좋게 타이르고 끝낼 일을 매로 끝내는 날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소년의 마음속 빈 곳은 증오라는 감정으로 채워졌어요. 

소년은 자신의 마음속 빈 곳이 사라졌다고 느꼈을 때부터 부모님과 멀어졌어요. 심지어는 부모님에게 욕을 하기도 했죠.

매번 욕을 할 때마다 소년은 부모님에게 맞았지만 그래도 그만두지 않았어요. 그렇게 소년은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청년이 되었어요. 

그리고 자신의 부모가 자기보다 약하다고 느꼈을 때 청년은 부모를 때리기 시작했어요.

어머니를 때리고 아버지에게 들켜 맞고 맞은 울분을 어머니에게 풀고 그런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죠. 

그러다 어느 날 청년은 언제나처럼 아버지에게 맞은 울분을 어머니를 때리며 풀고 있었어요. 그런데 뭔가 이상해요. 왜 어머니가 움직이지 않죠?

청년은 어머니를 때려죽인 사람이 되었어요. 아버지는 죽은 어머니를 보고 정신이 나갔는지 날뛰다가 결국은 자살을 선택했어요. 

이렇게 청년이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들은 파괴되었어요. 모두 청년의 손으로 파괴한 것이었죠.

청년은 그 사실을 꼭꼭 숨기기 위해 소녀 때와 같은 선택을 했어요. 소녀와의 추억이 담긴 상자를 다시 꺼내서 부모님과의 추억도 같이 상자 속에 집어넣었어요. 

이렇게 청년은 부모님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잃었어요.

그런데 지금 왜 이 상자가 밖에 나와 있느냐고요? 그야 청년이 꺼냈기 때문이죠. 청년은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파괴할 때마다 상자를 꺼냈고 그 상자 안에 추억들을 담았어요. 

지금 청년은 또 무엇을 파괴했을까요? 자신의 아내? 자식?

정답은 자기 자신이었어요. 계속해서 무언가를 파괴해 나가던 청년은 아니 지금은 청년이 아니지만요. 

계속해서 사람들을 파괴했고 그때마다 추억들을 상자에 담아 결국 지금은 남은 기억이 하나도 없는 빈껍데기가 되었어요.

자기 자신조차 자신이 파괴해버린 셈이죠. 파괴할 때마다 그 사실을 잊으니 매번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결국은 자신도 파괴해버린 남자.

이제 남은 건 몸뿐인 남자.

이제 이 남자에게는 죽음만이 남아있어요.

이제 곧 이 남자는 죽겠죠. 아무런 추억도 가지지 못한채 혼자 쓸쓸하게 죽은 남자

사람들은 처음에는 나쁜 놈 잘 죽었다며 욕을 하다가도 이내 남자를 잊을거고 그럼 이제 남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요. 남자와 조금이라도 깊게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남자의 손으로 죽여버렸으니까요.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죽는 남자 

원래부터 빈껍데기만 남은 몸이었으니까 죽어도 변하지 않는 남자로 그는 죽었습니다.

 

[출처] 추억을 담은 상자|작성자 혀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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